8월 6일 설교

작성자
이상호
작성일
2023-08-06 19:59
조회
263
성 경 : 13 : 9 17

제 목 : 예수 성도의 스승

13장 전반부는 예수님이 나의 주인 되심을 고백하는 성도들의 삶에 관한 지침서입니다.

우린 빠르게 변하는 세상의 유행이나 삶의 패턴에 마음을 빼앗겨 요동하거나 지나친 경쟁지향주의에 빠져서 주변을 돌보지 못하는 어리석음에서 벗어나 성도로서 구원에 선한 영향력을 끼치며, 함께 가는 사회를 꿈꿉니다.

그런데 그러기에는 자신의 역할이나 역량이 매우 부족함을 느끼고 좌절합니다.

히브리서 저자는 본문을 통해서 성도들의 위대한 스승인 예수 그리스도의 삶을 조명하면서 다른 것에서 삶의 교훈을 찾지 말고 예수님 앞으로 나오라고 권면합니다.

히브리서 저자는 예수님에게서 배워야할 것이 대해 다른 교훈에 끌리지 말라고 경고했습니다.

히브리서 저자가 활동했던 주후 64년경이나 21세기 최첨단의 사회를 사는 지금이나, 기독교인들에게 여전히 이슈가 되는 것은 이단들의 활동입니다.

당시에도 다양한 이단들이 활동했는데 정해진 율법 외에 갖가지 규칙을 덧붙여서 통제하는 유대율법주의자들이 있었고, 영지주의 세속주의 쾌락주의 물질주의 등 다양한 이단들이 활동하면서 자신들의 신분을 속이고 교회에서 성경교사로 활동하면서 성도들을 혼란에 빠뜨렸습니다.

이 상황을 잘 아는 히브리서 저자는 율법주의자들의 교리를 예로 들어 할례나 레위기에 기록된 음식들이 구원하는 것은 절대 아니다. 유대인에게는 제단이 있는데 일 년에 한 번 대제사장이 속죄의 피를 가지고 지성소로 가서 자신과 온 백성들의 죄를 대속하는 날에는 레4:5~12절의 말씀대로 잡은 고기를 영문 바깥 재 버리는 곳에서 고기를 다 불태우기 때문에 그날은 제단을 섬기는 사람들도 고기를 먹지 못한다면서 음식이 그 사람을 은혜로 인도하지 못함을 강조했습니다.

히브리서 저자는 구약시대에 대제사장이 속죄의 제물로 잡은 황소의 피를 가지고 지성소로 들어가는 속죄의 피가 있듯이, 예수님께서 대제사장으로서 백성들의 죄를 속죄하기 위해 예루살렘 성문 밖에 위치한 골고다로 올라가서 십자가에서 흘리신 속죄의 피를 비교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피는 대제사장에 의해 영문 밖에서 불태워진 희생의 피처럼, 그리스도의 피로 구원 받은 성도는 예수님의 치욕을 짊어지고 영문 밖으로 나가야 한다.’고 요구했습니다.

히브리서 저자가 말하는 그리스도의 치욕 예수님께서 ‘나는 하나님의 아들이다’고 말하면서 받은 모욕처럼, 예수님을 믿기 때문에 받아야 할 모욕과 비난과 불명예라고 말했습니다.

지금도 마찬가지지만 당시에도 예수님을 믿음으로 주변에 있는 불신자들에게 받는 모욕과 치욕의 결과인 고난과 아픔은 이루 말할 수 없습니다.  그 고통을 견디지 못하기 때문에 배교를 생각하고, 가족을 지킨다는 명분으로 공개적으로 예수님을 믿지 않겠다면서 예수님을 저주하기도 했습니다.

신앙생활 하다가 배교하거나 배교를 생각하는 사람은 장차 올 천국을 믿지 못함을 보여줍니다.

예수님은 반드시 다시 오셔서 세상을 심판하시고 고난과 핍박을 인내하면서 믿음을 지킨 성도들을 천국으로 데리고 가십니다. 눈물이 없고 죽음이나 고통, 해와 빛이 필요 없는 천국에 대한 확신이 없는 사람들은 결국 배교를 하게 됩니다.

히브리서 저자는 예수님의 교훈을 지키기 위해 찬송의 제사를 드려야 한다고 말했습니다.

15절에서 표현하는 찬송의 제사는 유대교에서 제사장들의 인도로 드려지는 찬양이 아니라,  오직 예수 그리스도에 의해 드려지는 찬양을 말합니다.

하나님께 드리는 찬송의 제사는 예수 그리스도의 희생제물이 하나님께 열납되었음을 찬양하는 것으로, 이것이 항상있어야 하는 이유는, 찬송의 제사가 끊어지지 않고 지속되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성도는 하나님께서 지속적으로 베풀어주시는 은혜와 사랑과 기적들을 체험하면서 구원의 완성을 이루어주신 하나님을 매일 찬양해야 합니다.

그런데 히브리서 저자는 찬양의 제사를 입술의 열매라고 확대해석했습니다.

입술의 열매에 대한 헬라어는 감사제와 감사 찬송 때 사용하는 말에 대한 히브리어 관용구입니다.

하나님께서 원하는 제사는, 하나님의 이름을 높이 올리는 찬양이 포함된, 하나님께서 제사를 받아주셨다는 감사와 하나님과 맺은 언약에 충실하겠다는 약속입니다.

다윗이 성막제사에서 성가대와 지휘자와 작곡가를 임명한 것도 하나님께 동물제사만 드리는 것이 아니라, 그 제사를 받으셨다는 믿음의 확신으로 제물을 받으신 하나님을 찬양하기 위함이었습니다.

그리스도의 피로 구원받았지만, 내가 드리는 예배가 하나님께서 기쁘게 받으셨다는 믿음의 확신을 가지고 예배의 대상이신 하나님을 찬양하는 감사가 포함되어야 합니다.

교회예배에서 말씀과 더불어 중요한 것은 회중찬송과 성가대의 찬양입니다.

개인적으로 저는 Libevoll 찬양 팀의 인도로 성도들과 함께 하나님께 입술의 열매를 드릴 수 있어서 매우 기쁘고 감사합니다.

모든 성도들이 함께 온 마음과 정성을 다하여 하나님을 찬양하고, 그 찬양을 통해서 하나님께 입술의 열매인 감사하는 마음을 드리기를 소망합니다.

찬양의 제사와 입술의 열매를 통해 성도에게 나타나는 좋은 모습은 선행과 나눔입니다.

개인주의와 이기주의적인 삶으로 주변 사람들을 돌보지 않는 것이 현실이지만, 히브리서 저자가 활동하는 시기도 경제적으로 어려울 때여서 전도자들을 대접하지 못하는 일들이 늘어나고, 주변에 연약한 사람들이 있어도 도와줄 엄두를 내지 못했습니다.

오죽하면 예수님의 동생 야고보가

약2:15~16=만일 형제나 자매가 헐벗고 일용할 양식이 없는데 너희 중에 누구든지 그에게 이르되 평안히 가라 덥게 하라 배부르게 하라 하며 그 몸에 쓸 것을 주지 아니하면 무슨 유익이 있으리요

라고 한탄했겠습니까?

도와줄 능력이 있음에도 평안히 가라. 따뜻하게 하라. 배부르게 하라는 말만 하는 것은, 상대방에게 상처를 주는 것이요, 위선적인 믿음입니다.

야고보가 지적한 것은 믿음 안에서 하나인 어려움을 당한 성도들에게 그들의 필요를 채워주지 않으면서 말만하는 것은 죽은 믿음이요, 주님 안에서 하나가 된 성도가 아니라는 책망입니다.

힘들고 어려운데 한가하게 찬양할 시간이 있겠느냐는 사람이 있을 수 있고, 힘들어 짜증나고 고통스러워 지금 이 순간을 피하고 싶은 사람에게 찬양하고 기도하라면 무슨 위로가 되겠습니까?

그럼에도 찬양과 기도를 계속해야 할 이유가 있습니다.

행16:25=한밤중에 바울과 실라가 기도하고 하나님을 찬송하매 죄수들이 듣더라

바울과 실라는 로마시민권을 가지고 있어서 벌 받을 필요도, 옥에 갇힐 필요도 없었습니다.

그러나 유대인으로 오해한 상관들의 잘못된 판단으로 변론도 하지 못하고 죽도록 맞았습니다.

더 수치스러운 것은 벌거벗긴 채로 군중들 앞에서 억울하게 매를 맞았다는 사실입니다.

복음을 전하다 겪는 이런 상황이 억울하고 짜증나고 화도 났을 것입니다.

그런데 바울과 실라는 옥에 들어와서 정신을 차리자 그 때부터 하나님을 찬양했습니다.

그것을 들은 죄수들은 얼마나 황당했겠습니까? 하지만 그들은 바울과 실라의 찬양을 들었습니다.

이후의 내용은 성도님들께서 깊이 묵상하셔서 더 잘 아실 것입니다.

문제는 나의 생활이 힘들어 찬양도 할 수 없다는 말이 하나님 관점에서는 거짓말로 들린다는 사실입니다.

행14:15=이르되 여러분이여 어찌하여 이러한 일을 하느냐 우리도 여러분과 같은 성정을 가진 사람이라 여러분에게 복음을 전하는 것은 이런 헛된 일을 버리고 천지와 바다와 그 가운데 만물을 지으시고 살아계신 하나님께로 돌아오게 함이라

바울과 바나바가 기적을 나타내자 시민들이 그들을 신으로 생각하고 제사 드리려고 하자,  바울은 “여러분과 같은 성정을 가진 사람이다” 즉 특별하지 않다는 것을 강조해서 말했습니다.

우리와 똑같은 바울이 고통 속에서 억울한 일을 당했는데도 하나님을 찬양했으니,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똑같이 구원받은 우리도 고난 중에 있더라도 하나님께 찬양의 제사를 드려야 한다는 것입니다.

17절에서는 너희를 인도하는 자 현재의 단어로는 목회자들에게 순종하고 복종할 것을 가르쳤습니다.

이 말씀은 7절의 확대로 성도를 가르치고 인도하는 목회자들에게 충성할 것을 당부한 것입니다.

목회자는 하나님 앞에서 맡겨주신 양들인 성도들에 대해 결산한다는 두려움으로 사역에 임합니다.

엄마가 슬프거나 화가 날 때는 절대로 아기에게 모유수유를 하거나 젖병을 물리지 말라고 어른들이 말씀하십니다.

어머니의 감정을 아기들이 그대로 받아 제대로 성장하지 못하기 때문이랍니다.

엄마의 마음이 아플 때 그 마음을 제일 먼저 받는 대상은 갓 태어난 아기로 그들의 정서적인 성장에 도움이 안 된다는 의미입니다.

목회자 또한 어머니와 같은 심정으로 성도를 돌보기 때문에, 목회자의 마음이 아프고 힘들면 그 영향은 성도들이 고스란히 받아서 성도들의 신앙에 유익이 없음을 강조한 것입니다.

저자는 18절에서 “우리를 위하여 기도하라”고 부탁한 것은 성도들의 기도로 더욱 활기차서 목회자들이 성도를 섬기는데 어려움이 없으며, 그 기쁨은 고스란히 성도들에게 돌아간다는 의미입니다.

목회자의 입에서 긍정적이고 미래지향적이고 확신에 찬 말씀을 듣기를 원한다면, 여러분들이 출석하는 교회 목회자들을 위해 적어도 하루에 한 번씩 매일 기도해주셔야 합니다.

성도들의 기도에 힘과 용기를 얻어서 목회자들이 사명을 잘 감당해서 하나님 앞에서 결산할 때 잘했다. 칭찬 받을 것입니다.

성도님들께서도 목회자들의 큰 힘과 위로가 되어주시기 바랍니다.

 

이 모든 말을 마친 히브리서 저자는 20~24절에 문안인사를 합니다.

문안인사의 특징은 디모데가 옥에서 풀려난 지 얼마 되지 않았다는 점을 통해 히브리서 저자 역시 온갖 핍박을 받고 있음에도 예수 그리스도의 우월성과 예수 그리스도께서 평화와 심판의 왕이요, 신앙의 정석이요, 구원의 완전한 보증이시며, 예수님만이 생명의 길임을 강조했다는 사실입니다.

히13:22=형제들아 내가 너희를 권하노니 권면의 말을 용납하라 내가 간단히 너희에게 썼느니라

예수님을 믿는다는 말 한마디에 육체와 감정을 유지하기 힘든 옥중생활을 겪다가 풀려났지만, 고문의 후유증으로 고생하면서도 오로지 믿음의 배교를 생각하는 자들을 생각해서 기록한 히브리서를 마치면서 겸손함으로 자신의 권면을 받아들여달라고 부탁했습니다.

이 내용을 통해서 저자의 겸손과 그리스도를 향한 뜨거운 열정을 배울 수 있습니다.

이어진 25절은 히브리서 저자가 진심을 다해 형제들을 축복하는 내용입니다.

단순한 인사말이 아닌 그리스도의 사랑을 체험하면서 고난 받는 형제들의 영혼을 생각하고 그들을 뜨겁게 축복하고 권면해준 것으로 믿음 위에 굳게 설 것을 호소했습니다.

 

말씀 마지막에 이탈리아라는 이달리야에 복음의 문이 열려 그곳에 있는 성도들이 아시아에 흩어진 기독교인들에게 문안 인사한다고 말하는 대목과 다모데에게 “우리의 형제 디모데”라고 말하면서 “그가 속히 오면 만나겠다.”는 대목에서 히브리서의 저자가 바울이라고 해석하기도 합니다.

왜냐하면 그는 실제 로마에 가고 싶었고, 디모데에게 ‘우리 형제(살전3:2)’라고 말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히브리서 저자가 누구이냐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어려움에서도 성도들을 권면하고 복음을 전하려는 그의 열성을 배워서 우리의 스승이신 예수님께 찬양의 제사를 드리고 입술의 열매인 긍정적인 믿음을 보여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인도해주시고 보호해주심을 날마다 찬양해야 합니다.

무엇보다 성도의 스승이신 예수님의 말씀에 순종하고 복종해야 합니다.

우리가 아무리 성경을 잘 알고 오랜 기간 신앙생활 했더라도 삶의 주인이 예수님이심을 고백하지 못하고 선뜻 자신의 미래나 비전이나 꿈을 내어드리지 못한다면 바른 신앙은 아닐 것입니다.

주님이 나의 주인 되심을 고백하고, 예수님께 모든 것을 명의이전해서 나의 스승이신 주님의 뜻에 순종해서 그 길을 걷는다면 모든 것에 부족해도 예수님은 기뻐하십니다.

이런 은혜가 말씀을 듣는 성도들에게 충만하시기를 진심으로 바랍니다.  - 아멘 -
전체 1
  • 2023-08-06 20:01
    시스템 오류로 녹음이 되지 못해 원고를 올립니다.
    은혜의 시간이 되시기 바랍니다.
    평안한 한 주간 되십시오.